탈북자들의 수기

    등록일 : 2013-10-01 오전 10:54:23  조회수 : 9715
  33 . 탈북여성-소향의 수기(퍼온글 )
  등록자 : durihana        파일 :

잊고 살던 지난날을 글로 쓰는 내 손가락이 지금 떨린다.  
아직 한 번도 내 비치지 못한 가슴 속 깊은 사연 때문에 또다시 눈물이 흐른다.  
떨리는 이 분노 어디에 토해야 하나!?

‘고난의 행군’시기 우리는 장군님 한사람만을 믿었다.
굳게 닫힌 배급소 문은 언젠가는 다시 열릴 것이라고 믿었고  
농장에서 분배 몫 잘릴 때도 다음해는 풍년이 들겠지 기다렷다.  
  
배급소 문이 닫히던 90년대 초 우리 아버지는 사경을 헤매.  
‘위천공’으로 위를 갈랐지만 위는 멀쩡하고 소장이 터진 것 발견하고 재수술,
  
북한도 환자가 나오면 그 가족은 천길 나락.  
3차에 걸치는 대수술에 아버지도 지쳤고 나도 지쳤다.  
7개월 동안 뒤로 변을 못 보기에 배꼽으로 볼일을 보아야 했던 아버지,  
시도 때도 없는 변으로 하루 한 끼 차례지는 밥도 밥상에서 먹을 수 없다.  
이런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니다.  
언니 오빠가 한시에 돌아버린 것이다.  
정신병 내력 없는 가족에  두 사람이 나온 것을 무엇으로 해석해야할까!?

기아와 굶주림은 정확히 내 정수리에 떨어졌다.  
고통속의 아버지도, 정신 나간 오빠와 언니도 집안 실정 감감 모르시니
세상이 이제는 녹두알만하다.

농장에 나가 통사정하여 아버지 영양을 위하여 찹쌀이며 낙태한 염소새끼며 갖다가 고아드리고  
지어는 농촌지원 학생들 식당과 병원에서 버린 소 뼈다귀를 망치로 때려서 우려낸 물에 밥 지어 대접해드리니 그런대로 호전했으나  
정신 나간 언니 오빠는 돌아올 수가 없다. 걸핏하면 도끼, 톱, 가위를 쥐고 나하고 아버지한테 달려들기가 일쑤다.

내가 열 살도 되기 전에 돌아가신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엄마는 이런 꼴로 살라고 나를 두고 먼저 갔어요!?
아버지와 돌아버린 형제들을 내 어깨위에 얹어놓으면 나는 어떻게 살라고???

죽고 싶다. 살아서 뭐하냐. 이런 꼴 저런 꼴 다 보기 싫다.  
하지만 내가 죽으면 남은 가족들은 또 어쩌고???  
  
가정의 기둥이었던 오빠가 이 꼴이 되어 내 앞으로 다 옮겨왔지만  
아버지의 병간호로 일을 못하니 온가족 분배가 다 잘렸다.  
결국은 죽으라는 말 밖에 더 있는가?

하지만 살아야 하겠다.  
언제 덤벼들지 모르는 정신없는 오빠를 데리고 산에 가서 닥치는 대로 캐고 주어온다.  
그래도 하루에 한 끼밖에 차례질 수 없는 우리 살림.

착하고 부지런하기로 소문났던 오빠가 정신 나간 지금은 일하기를 딱 싫어한다  
온 하루 도토리 한줌을 줍고는 졸졸 내 뒤만 따라 다닌다. 미칠 지경이다.  
지금은 죄스럽지만 차라리 빨리 안 죽나 싶다.

마대 같은 배낭 하나 가득 채우면 산골짜기에서 해가 넘어간다.  
허겁지겁 산을 내려오다가 나무가치를 보면 또 주어 와야 한다.  
이제는 내가 소녀가장이 된 것이 실감 나 눈물을 씹어 삼킨다.  
저녁은 또 어떻게 뭘 해먹나?

낑낑거리면서 집에 들어서자 썰렁한 집안, 온기라고는 느껴도 안 진다.  
죽고 싶다는 생각에 도토리 줍다가 곰을 따라다닌 적도 있다.  
하지만 살아서 고생하라는지 나한테는 눈도 안 돌린다.  
죽일 가치도 없는 목숨 이였든가?!

그렇게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간다. 이 겨울은 어찌 살까?  
겨울이라고 앉아 있을 수가 없다.  
눈 속을 헤집고 다람쥐가 먹다버린 도토리라도 주어야 식구들 입에 풀칠할 수 있다.  
돌 사이를 곡괭이로 파면 언 손잔등이 짝짝 갈라진다. 피가 샘솟는다.  
북방의 날씨도 나를 애를 먹이려고 작정을 했나부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나고 이년이 지나고 삶이 점점 고달프다.  
엄마가 또 원망스럽다.  
차라리 멜레(묘 이장)라도 해볼까?  
생각을 하니 별로 어려운거는 아니었다.  
아버지하고 의논해서 엄마의 묘소를 찾아가서 제를 지내고 이장을 서둘렀다.  

이런 일은 미루면 안 된단다. 귀신이 노한다나.  
그래서 그냥 하기로 했는데 형부라는 사람이 묘를 좀 파더니 못하겠다고 나앉는다.  
그럼 어쩌란 말인고. 할 수 없이 내가 삽을 들고 무덤을 겁도 없이 제껴 댔다.

뼈를 꺼내야 하는데 잘 발라 안 진다. 나무칼로 살을 뜯으니 잘 안 된다.  
장갑 벗어 메치고 칼을 집어던졌다. 손이 시원히 말을 잘 듣는다.  
이렇게라도 하면 꼬인 집안이 혹여 풀릴지,  
돌아간 엄마 귀신이 노여움이 풀릴지 간절한 소망안고 끝내고 이장을 마쳤다.

집으로 돌아오니 긴 한숨과 함께 송장 냄새가 코를 찌른다.  
긴장해서 느끼지 못한 것이 인제야 느껴지는 가부다.  
술, 술밖에 날 달래 줄 것이 없다.

계절은 흘러서 다음해가 되었다.  
오빠를 정신병원에 보냈으나 탈출해서 생강냉이 씹어 먹으면서 집이라고 찾아왔다.  
봄이면 계집애가 소나무를 타고 올라서 솔 화분을 채취했다.  
이제는 나도 기력이 쇠진했다.  
몇 년을 앓는 아버지와 정신이 없는 형제를 살리느라고 살 기운이 다 빠진 것이다.

설상가상 오빠가 사고를 쳤다. 농장의 소를 잡았다. 그때 소 잡고 감옥 가서 죽은 사람이 얼마였든가?  
하지만 이렇게 죽고 저렇게 죽을 바에야 우리도 소고기나 배불리 먹어보자.  
나도 참을 수가 없다. 나도 살고 싶다.  

근데 재수 없는 넘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고  
밤중에 뼈를 찍는 소리를 동네 경비가 듣고 신고를 했다.  
비록 정신 나간 사람이 끌고 들어온 소지만 근데 내가 소를 죽였다.  
나도 살고 싶다. 아, 어쩌란 말인가...

안전부행도 내 몫이다. 취조를 한다.  
하지만 나는 가족을 살리고 싶다, 나는 죽어도 아버지만큼은 살리고 싶다.  
결국 고기 한 점 입에 넣지 못했고 또한 집안의 기둥인 나를 처벌하면
병자의 가족을 누가 책임질 것이 인정해서 겨우 그 사건이 무마 되었다.  
하지만 소도둑이라고 뒤 따라다니는 따가운 눈총들,  
어쩌랴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임금도 사흘만 굶겨 놔봐라. 도둑질 안하나.  
내가 도둑이라면 농작물 가지고 너네 마음대로 하는 것은 머냐.  
하지만 허탈하다. 이제는 어찌하고 살까?

이제는 정말 맥이 빠졌다. 먹는 것은 고사하고 집은 불하나 안 때고 그렇게 3일,  
아버지가 난리를 떠신다. 물이라도 먹어야 산다고...  
허참 물 먹고 오늘 하루 살고 내일은?  
차라리 눈 감고 가만있으니 편하다.  
이제는 굶주림도 몸에 배인가 부다. 이리 뒤 척 저리 뒤 척 그렇게 또 3일.

그나마 소뼈물이라도 우려 드셔 그런지 이젠 아버지가 나서신다.  
집안 기둥인 딸년이 죽는 하고 하소연하셔 이웃에서 쌀 한 되 얻어 왔다.  
죽 끓인다. 일어나서 먹으란다.  
오빠 역시 윗방 침대에 누워서 내 자세 그대로 흉내를 낸다.  
일어나서 죽 한 모금 입에 넣으니 배가 얼얼해 온다.
윗방을 흘겨보던 아버지 죽 그릇 들고 올라가셨는데 좀있다 다급하게 소리치신다.  
왜 그럴 가보니 한술 떠서 넣어준 죽이 오빠의 입가로 주르르 흘러내린다.  
죽 한술도 넘길 힘이 없어진 오빠가 되어 버린 것이다.  
별로 놀랍지도 않다. 어차피 가기를 예고한 목숨들이 아닌가.

칠성판에 눕혔는데 실감이 안 난다. 죽은 거 같지를 않다.  
무덤을 만들었지만 비석은 없다. 총각이라서 없단다.  

눈물도 아마 사치 인가부다. 내 눈에는 눈물도 안 난다.  
오히려 주위사람들이 대성통곡을 해 댄다.  
아니꼽다. 너희들이 이제 와서 먼데 통곡이야?

젯밥으로 올려놓은 이밥 한 그릇,  
그걸 보는 아버지의 눈이 빛이 난다.  
드리니 누가 먹을세라 뚝딱 해치우신다.  
오빠를 묻는 그길로 집으로 돌아왔다.
텅 빈 집,  
그나마 정신없어도 사람이 들어오면 멀뚱멀뚱 쳐다보던 그 얼굴이 안 보인다.  
이제 서야 갑자기 울음이 터진다.  
아버지와 나는 그렇게 부둥켜안고 온 하루를 울었다.  
간 사람이 불쌍도 하지만 또 살아야 할 앞날이 캄캄하여 울었다.

농장에서 식량 몇 키로를 준다. 산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나이다. 어이가 없다.  
한 송장이 나오니 두 송장이 나올까봐 인제야 쭉정이 강냉이라도 차례가 오나 부다.

강냉이속청을 얻어다가 같이 분쇄를 해서 양을 늘려서 끼니에 보탬을 했다.  
먹으면서 확실히 죽은 놈만 불쌍해보였다.

오빠 한 사람이 줄어드니 내 힘으로 살아가는 데 조금 나아진 것 같이 느껴진다.  
하지만 김일성의 애도표시로 다문 며칠이라도 농장에 나와서 일하란다.  
그럼 내 하루하루 끼니는 당신들이 해 주는가?

다음해 봄이 되니 또 기근이 닥쳐온다.  
보릿고개부터는 마을 곳곳에서 도둑질하다가 살인나고 목매자살하고  
하룻밤만 지나면 온 마을이 뒤숭숭하다.  
이 상태로 가면 작년의 그 꼴을 면치 못하는데...

아버지한테 중국가자고 했다. 안된단다. 겨울에 가자고 한다.
아버지 몰래 중국 가서 친척 찾아서 돈 얻어 가지고 와야지.  
통 강냉이 몇 키로와 국수 한 사리 남겨놓고.  
“아버지 딸이 꼭 돌아 올 테니 기다려 주세요.”써놓고  
죽을지 살지 모르는 길을 떠났다.  

지금도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떠 난지 이제는 십년이 지났다.  
아버지는 그 다음해 내 이름 부르고 부르다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이 딸이 아버지한테 쌀밥 배불리 드리겠다고 목숨 걸고 떠났건만  
그 약속 지키지도 못한 채 나의 가슴에 빚만 남기고 떠나가셨다.  
(오빠가 가던 해, 그 달에 언니도 저세상으로 떠나갔다.)  

이렇게 나는 졸지에 부모형제 다 잃고 내 그림자만 밟게 된 고아가 되었다.  
우리의 이 고생이 왜 생겼는지, 내가 게을러서? 일하기 싫어서?  
나처럼 돌 위에 올려놔도 산다는 사람이 아마 없었을 것이다.

나름대로 효도도 하려고 했지만 세상은 나에게 자식으로써,  
동생으로써 앓는 형제를 돌볼 수 없이 각박하게 만들었다.
그럼 이런 비극을 만들어 낸 것이 누구인가? 내가 살인자인가?  

그럼 그게 누구인가?  
우리가 그렇게 목숨 걸고 지키던 사회주의와 장군님이 안겨다준 비극의 종말이다.  
나는 거기서의 종말로 그치고 싶지 않아 자유 대한민국으로 찾아왔다.  
역경을 헤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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