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눔마당

    등록일 : 2017-12-20 오후 8:41:04  조회수 : 3716
  2521 . 白石대학교 신학대학원 총동문회 송년감사예배 및 제1회 자랑스런 백석인상 시상식
  등록자 : durihana        파일 :














샐러리맨 천 기원, 목사가 되다.

천 기원목사가 탈북자 구출활동을 시작한지도 18년이 되어간다. 미국의 월 스트리트 저널지에 게재된 ‘노벨평화상에 해당하는 활동을 하는 사람’이라는 내용의 칼럼 중에 천 목사의 이야기가 소개된 적이 있다. 천 목사는 2017년 현재 약 1,100명의 탈북자를 구출하였고 자신도 중국 공안에 붙잡혀 영하 40도에 달하는 극한 형무소에서 8개월간 투옥된 경험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활동을 계속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탈북자들의 ‘탈북’은 말 그대로 목숨을 건 것이기 때문에 심신이 극도로 한계에 다다라 어쩌다 보니 살아남았다고 하는 사람이 많다. 누구도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것이 ‘탈북’인 것이다.

‘목숨을 건다’는 것은, 북한 국경에서 탈북자를 데리고 도망치는 탈북 도우미도 마찬가지다. 시간에 생명이 깎여가며 셀 수 없을 만큼 수많은 탈북인을 직접 도와온 천 목사의 몸은 어떻게 되어 있는 것일까.

“괜찮아요. 경상북도 경산군 송림동의 빈곤한 농가에서 태어나, 매일 소를 몰고 산을 타거나 땔감을 주웠기 때문에, 몸이 자연스레 튼튼해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탈북자를 안내하기 위해 라오스나 캄보디아의 정글의 산을 넘을 때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1995년, 천 목사는 사업차 북한과 중국의 국경마을인 도문[圖們]과 훈춘[珲春]에 갔다. 도문에 도착해 다리를 건너려는 순간 무서운 광경을 봤다.

“강이 얼어 있었는데, 그곳에 구두를 신은 사람의 다리가 나와 있었어요.”

놀라서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북한에서 중국으로 밀입국하는 탈북자가 국경을 넘다가 빠진 시체가 두만강까지 떠내려 온 거라며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는 것이었다.

충격을 받고 주변을 둘러본 천 씨의 눈에 들어온 것은, 도문시 건너로 보이는 북한의 헐벗은 산야와 허름한 집에 살고 있는 가난해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가이드와 함께 한참 차를 타고, 도문시에서 30km정도 떨어진 동쪽 마을, 훈춘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 두 명의 아이가 다가왔다.

“6,7세 정도 되는 구걸하는 아이들이었습니다. 불쌍해 보여서 얼마 안 되는 돈을 건네주었습니다. 그리고 뒤돌아 오는 순간 비명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돌아보니 중국 공안이 몽둥이로 애들을 때리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여자아이의 귀가 찢어져 피가 나고 있는 게 멀리서 봐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런 험한 일이 길거리에서 일어나도 지나가는 사람 누구도 관심 없는 듯 한 표정이었습니다. 가이드의 설명으로는 그 아이들은 ‘꽃제비'라고 하는 굶주린 북한 아이들로 공안이 잡아서 북한으로 돌려보내도 다음날 또 중국 쪽으로 넘어 온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오후, 훈춘시장에 가니 한 곳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있었다. 가까이 가보니 16~17세 정도의 여자아이 둘을 어른이 차에 억지로 태워 데리고 갔다. 살려 달라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먹을 게 없어서 북한에서 국경을 넘어온 아이라는 것이었어요. 그런 애들은 처음에 발견한 사람이 데려가서 같이 살아도 되고, 술장사하는 사람에게 팔아도 되고, 무엇을 하든 자유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이 아니라 마치 원숭이와 같은 취급이었습니다.”

천 목사는 쇼크로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그 길로 훈춘에 있는 교회에 들어가 “하나님! 이런 건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으니, 앞으로 이곳에 절대 오지 않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운명의 수레바퀴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국에 돌아온 천 목사는, 지금까지 해 온 모든 사업의 실패로 실의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린 시절 독실한 크리스천이던 어머니가 자신의 머리에 손을 얹고 항상 “주의 종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던 기억이 떠올랐고 지금까지 스승으로 모시는 김종순목사님의 권유와 가르침으로 신학교에 진학하기로 한다.

1999년 7월, 신학생이 된 천 목사는 전도사로써 동료들과 함께 중국의 연길 시에 선교여행을 갔다. 그 곳에서 또 다시 4년 전과 거의 같은 상황을 목격하게 된다. 유일하게 다른 점은 계절이 여름이라 강의 얼음이 녹아있고, 북한사람들의 시체가 도문교에 걸려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는 점이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이틀간, 너무 마음이 아파 이불에 드러누운 채로 일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누워만 있을 뿐 전혀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끝에, 이 사실을 어찌 됐든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컴퓨터 한 대와 홈페이지 제작법 책을 사서 혼자서 열심히 홈페이지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천 목사는 남과 북, 둘이 하나가 된다는 의미로 ‘두리하나’라는 이름으로 선교회 홈페이지를 만들었다.

“인터넷의 영향력이 대단했어요. 홈페이지를 본 분들로부터 연락이 계속 오고, 20~30명 정도의 사람이 모여 함께 북한을 생각하며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후원금도 모아 탈북자를 위한 쉘터를 중국 연길과 장춘에 만들었습니다.”

설립목적은 북한 복음화를 위한 것이지만 한국 사람은 북한으로 들어갈 수가 없기에 탈북 하여 유리방황하며 고통당하는 탈북자들을 보호하고 구출하는 것이 목표가 되었다. 설립 당시 천 목사는 비참한 환경에 처한 탈북자들의 현실을 어떻게 하면 세상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을까 하는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당시는 정부를 포함해 이 문제를 심각히 받아들이고 세상에 알리려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천 목사, 몽골국경 가까이에서 체포되다

2001년 12월, 12명의 탈북자를 구출하기 위하여 중국에서 몽골로 향하던 중, 중국 국경 가까이에서 중국 공안에게 체포되었다. 탈북자들은 북한으로 강제송환되었고 천 목사는 중국 내몽골 오지 감옥에 수감되었다. 지금은 천 목사의 사위가 되어 한국에서 사회생활을 하는 중국 검사의 취조를 받으며 고문은 없었지만 독방에서의 외로움과 12월 중국 오지의 추위는 혹독했고 영하 40도, 50도의 날씨에 난방은 하루에 30분간 4번 뿐, 나중에는 추위에 몸이 떨려서 잠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투옥되어 있는 8개월간 한국 정부의 면회는 없었고 미국 정부의 석방결의안 영향으로 2002년 8월, 한국으로 추방되었다.

탈북 청소년들에게 희망을 찾다

천 목사는 현재도 탈북자 구출을 지원하고 있고 지금은 성인보다도 탈북 2세에게 큰 관심을 갖고 그들의 교육에 힘을 쓰고 있다.

2009년, 탈북청소년 대안학교인 ‘두리하나 국제학교’를 설립하여 그들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고 꿈을 심어주어 통일한국시대의 리더로 자라나도록 양육하고 있다.

1등이 되기보다는 감동을 주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며 60여명의 식구들과 하루의 시작을 새벽예배를 통해 꿈과 끼를 키우고 있다.

“버림받고 상처 받아 스스로 삶을 개척해야 하는 아이들에게 나누고 섬기는 삶은 어색합니다. ‘두리하나’에 와서 아이들이 서로 협력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다들 자기주장이 강하고 언제 싸움이 날지 모르고 해서 어떻게 하면 하나로 융화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합창단을 만들었습니다. 합창은 자기 목소리만 주장해서는 화음을 이루지 못합니다.”

합창단 초기, 서로가 제멋대로 부르며 시끄러웠기 때문에 ‘와글와글 합창단’이라고 불렀고 자신들의 합창의 심각성을 안 아이들은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천 목사는 기쁜 듯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2014년 3월,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 리더쉽 컴퍼런스에서 합창을 선보여 국제사회의 정치적 지도자로부터 칭찬을 받았습니다. 합창단원 30명 전원의 목소리가 어우러져 예쁜 하모니를 자아내기 위해서는 자신의 목소리를 없애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모니가 중요한 거예요. 한국이 통일을 하기 위해서는 남도 북도 없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합창도 한국 통일도 자기를 주장하지 말고 화합을 중요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합창단 아이들은 적응력, 집중력이 뛰어나다고 천 목사는 말한다. 그들은 한국 노래뿐만 아니라 팝송도 부르지만 그들에게 영어는 서투르다. 미국인 자원봉사자가 ‘두리하나 국제학교’에 와서 영어를 가르쳐주고 아이들도 열심히 공부한다고 한다.

2016년 9월에는 청와대에 ‘와글와글 합창단’이 초대되어 박근혜 대통령 앞에서 노래를 불러 대통령이 아이들의 맑은 목소리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천 목사는 미래의 세계적 리더를 육성하기 위해 매년 아이들과 함께 미국대륙을 2주간에 걸쳐 횡단하러 간다. 천 목사는 “이건 우리 애들한테도 못 시킨 여행입니다.”라며 웃었다. 이 여행을 마치고 아이들은 확실히 크게 성장했고 세계를 보는 눈이 바뀌었다고 한다.

탈북자에게 그리고 한국 사람들에게

“한국은 아직 탈북자를 받아들이는 시스템의 준비가 덜 되어 있는데, 탈북자들은 밀려들어오고 있습니다. 미국은 난민을 받아들이는 경우, 굉장히 합리적으로 진행됩니다. 일단 돈을 쥐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돈을 벌기 위한 방법을 가르쳐 줍니다. 한국인은 우리의 눈 높이 기준으로 탈북자를 보면 안 됩니다. 그들은 이 사회에서는 아직 아기입니다. 매스컴도 조금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그냥 잠시 지켜봐 줬으면 합니다. 탈북자 3만 명이 제대로 한국사회에 정착되게 하려면 인내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인도 탈북자를 통해 사회주의에 대해 공부하고 이해하면서 미래의 통일을 향해 준비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성적으로 접근하면서 따뜻한 마음으로 그들을 감싸줬으면 합니다.”

2번째 천 목사와의 만남을 위해 사무실을 방문한 날, 그는 땅에 닿을 만큼 몸을 숙이고, 작은 여자아이와 놀고 있었다. 탈북 여성의 아이다. 인사를 주고받으며 1살짜리 여자아이를 상대하고 있는 모습에, 목숨 걸고 탈북자를 구한 용자의 늠름한 모습은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아이의 눈 높이에 맞춰 웅크리고 있는 그의 등을 만지면 화상을 입을 정도로 따뜻한 인간애가 전해지지 않을까.

북한 스파이로부터 어떠한 살해협박을 받아도 이 활동을 멈추지 않는 천 목사는 탈북자에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임에 틀림없지 않을까…….

글쓴이 동경 ‘이바라키 그리스도교대학’ 신미화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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