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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 스
    등록일 : 2009-06-12 오전 11:35:54  조회수 : 955
  4 . 제비처럼 살다 마흔에 얻은 새로운 인생  
  등록자 : 두레신문        파일 :

 

No, 4
이름:두레신문
출처:http://dooraenews.com/news/view_news.php?vnum=693&catname=
제비처럼 살다 마흔에 얻은 새로운 인생  

 
하나원’을 찾아가 탈북시킨 북한주민을 만난 천기원전도사

사실 나는 전도사가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목회자라면 깊은 신앙심을 갖고 평생을 다른 이의 존경을 받는 삶을 살아왔어야 하는데, 나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나는 ‘날라리 신자’였음을 고백한다.

어릴 적 우리 집은 무척 가난했다. 경상북도 경산시에서 한참을 들어가야 하는 용성(龍城)면 송림(松林)동 외딴 마을에서 나는 3남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녔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 중학교도 못 다닐 형편이었지만 목사님의 추천으로 대구시내에 있는 고등기술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40세에 신학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내 학력은 이것이 전부였다.

19살에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무작정 상경하여 둘째 누나 집에 얹혀살면서 대연각호텔 객실부 웨이터 생활을 시작했다. 입사한지 5년 만에 나는 지배인이 되었다. 그 후 엠베서더 호텔, 서교 호텔, 강남 뉴월드 호텔 등을 두루 거치며 간부 생활을 했다. 그렇게 23년을 보냈다.

1988년에는 잠깐 동안 호텔 나이트클럽의 사장을 했다. 하지만 그곳은 내 생리에 맞지 않았다. 6개월 정도 하다 팔아치우고 다시 호텔 과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1992년 호텔일을 그만두고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나이트클럽 이래로 내가 하는 사업은 번번이 실패했다. 1996년 나는 완전히 빈털터리가 되어있었다.

그런데 내 인생을 바꿔놓는 계기가 생겼다. 오래 전부터 나는 ‘목사가 되라’는 권유를 자주 받았다. 1996년 8월11일, 부천 송내 중앙 감리교회 김종순 목사가 인도하는 부흥회에 참석했다. 그날 예배를 마치고 나는 김종순 목사를 호텔까지 차로 모셔다 드리는 일을 맡았다. 한참을 운전해 가는 도중 뒤에서 “집사님, 혹시 목회 하실 생각 없으세요”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생각할 것도 없이 나는 “아니오”라고 잘라 말했다. 그랬더니 “집사님은 목사를 하셔야 되는데…”라는 혼잣말이 들려왔다.

다음 날 부흥회를 할 때 김 목사님은 사람들 앞에 나를 불려 세웠다. 그리고는 느닷없이 “이 사람은 꼭 목사를 해야 할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제비가 될 사람입니다”라고 했다. ‘사람들 앞에서 이 무슨 창피를 주는가. 내가 제비라고!’ 화가 났다. 그러나 목사님은 시간이 날 때마다 나를 사람들 앞에 세우면서 “목사가 되어야 할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나를 위해 기도했다. 자꾸 그러니 ‘무슨 뜻이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내가 목사가 되면 나를 아는 사람들이 ‘저런 사람도 목사가 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할 것 같았다. 목회자가 될까 말까 하는 생각으로 두 달을 고민하며 보냈다.

어느 날 장경우 목사께 전화를 걸어 내 고민을 상담했다. 그는 “왜 나같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사람보고 목사를 하라고 하느냐”란 질문에, “당신이 쓸모 있는 사람이었으면 목사 하라는 말을 안 했을 것이다.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목회자가 되라는 것이다”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도밖에 없다. 열심히 기도하여 새사람이 되겠다.’ 마침 딸도 다음 해에 대학을 입학하게 돼 등록금 마련이 걱정되었지만, 나는 신학 대학에 입학하기로 결심했다.

1997년 나는 천안대학교에서 운영하는 기독 신학대학에 입학했다. 신학 대학 생활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다. 당시 나는 많은 빚을 안고 있었다. 빚쟁이들은 교회에까지 찾아오고 사기죄로 경찰서에 몇 번 불려 다니기도 했다. 할 수 없이 신학 대학을 한 학기 휴학하고 빚부터 갚기로 했다.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 무역업을 하러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6개월만에 모든 자금을 까먹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인생을 바꿔놓은 중국 선교여행

그리고 그해 8월 내 인생을 바꿔 놓게 된 또 하나의 계기인 ‘중국 선교여행’을 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중국을 떠돌고 있는 탈북자들을 보았다. 얼굴이 시커멓게 된 채 먹을 것을 좀 달라고 울며 따라붙는 ‘꽃제비’라 불리는 북한 아이들, 단돈 500원(한화 7만 5천원 정도)에서 3000원 사이에 성(性)노예로 팔려 다니는 북한 처녀들…. 차마 눈뜨고 바라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한국에 돌아온 우리는 북한에 대한 지원과 선교가 시급하다는데 뜻을 모으고 ‘선교회(宣敎會)’를 만들었다. 두레교회 당회장 김진홍목사님을 이사장으로모시고 12명의 발기인으로 시작된 그것이 ‘두리하나선교회’다. 홈페이지 만드는 기술을 배워 그 해 10월16일 두리하나 홈페이지(http://www.durihana.com)를 열었다.

어느 날 아들이 학교에서 쓰러졌다는 연락이 와 달려갔다. 병원에 입원시키고 보니 심장병이라며 수술을 받게 되었다. 병원비가 45만원 정도 나왔는데, 생활보호 대상자였기에 병원비가 싼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 돈이 없어 절절 매는데, 아들 담임선생님께서 전화가 왔다. 학교에 찾아가 보니 학급 아이들이 모은 돈이라며 봉투를 내놓았다. 20만원 정도 되는 돈이었는데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런데 봉투를 건네면서 선생님이 조용히 한마디를 덧붙였다. “한웅이 아버님. 한웅이 말을 들어보니 아버님이 북한 사람들 돕는 일을 하신다는데, 자기 가정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면서 어떻게 남을 돕는다고 하십니까. 일단은 가정부터 살피세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딱 멎는 듯 했다. 너무도 창피해 그 자리에서 그냥 사라져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떻게 돌아왔는지, 소중한 돈은 잘 들고 왔는지도 모른 채 집에 돌아와 한참을 울었다. 사실 맞는 말이 아닌가. 자기 식구도 못 먹여 살리는 주제에 무슨 굶주린 북한 동포를 살리고 그들의 인권을 운운한단 말인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갈등과 시련의 시기였다.

탈북자들을 한국으로

그런 가운데도 북한 선교를 추진했다. 두리하나 선교회에서 한국으로 데리고 온 탈북자는 170명 정도인데, 그중 내가 데리고 온 사람들이 150여명이다. 그들을 데리고 올 수 있도록 물질적으로 기도로 후원해주는 곳은 두레 선교회다.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하는 북한 선교사업 중 일각일 뿐이다. 선교활동 초기 우리는 쌀과 돈을 중국에 보내주고, 꽃제비들을 수용할 고아원을 중국에 마련하는 일을 추진했다. 그러나 중국 정부가 고아원 설립을 허가하지 않자 비밀스럽게 피난처(북한관련 NGO 관계자들은 대개 ‘쉘터 shelter’라고 부른다)를 마련해 탈북자들을 돌본 것이 오늘날 탈북자들을 한국으로 데려오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우리는 보호를 받는 재중(在中) 탈북자들에게 한국행을 권유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가능한 한 그들이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길 바란다. 북한에서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계속하면서 선교활동을 벌이도록 하는 단체도 있지만, 우리는 그것을 목표로 하지는 않는다. 북한에서 기독교인은 1급 정치범으로 분류되는데 그들을 억지로 사지(死地)에 몰아넣을 생각은 없다. 본인이 기어이 그렇게 하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한국에 가야 할 특별한 사연이 있는 사람들만 우리는 한국으로 데려온다.

나는 앞으로 3년 이상은 중국에 가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할 일은 더 많아졌다. 선교회 내부 일을 돌보고, 나 대신 중국으로 갈 사람들을 위한 교육도 할 생각이다. 부지런히 여기저기 얼굴 내밀면서 북한과 탈북자들의 실정을 알리는 일도 본의 아니게 생겼다.

중국에서 어려움을 겪었지만 나는 중국 정부에 대해 개인적인 원한이나 원망은 없다. 다만 이 말을 꼭 하고 싶다. “중국 땅에서 눌러 살겠다는 것도 아니고, 다만 다른 나라로 보내달라는 사람을 왜 중국 정부는 기어이 막아서고 있는가? 21세기는 인권의 시대다. 인권을 모르는 나라는 대국(大國)이 될 수 없다.” 내가 데려오지 못한 탈북자들을 북한으로 송환하지 않고 그들이 원하는 나라 대한민국으로 보내 줄 것을 중국 당국에 간절히 호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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